서양사

그리스 역사 제 3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마라톤 전투, 테르모필레 전투, 아르테미시온 해전)

민훈트 2020. 7. 9. 18:59

저번 편에 이어, 이번편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 대해 알아볼께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이 전쟁은 그냥 나라와 나라의 싸움이 아닙니다. 

서양사에서 이 전쟁을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

바로 이 전쟁을 구시대적 지배질서인 막강한 왕권을 대표하는 페르시아제국과 신질서, 즉 결과론적으로 보면 아테네의 민주주의로 대변되는 그리스 폴리스 국가들의 싸움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만약 이 싸움에서 그리스가 이기지 않았다면, 페르시아는 지금 서양문화의 근간인 라틴문화를 다 먹을 수도 있었죠. 그러면 지금의 서양문화나 그에 파생된 모든 것들이 없었겠죠?

다행히 그리스가 이기게 되고, 그리스 문화의 전성기 "고전기"가 시작되게 되죠. 

그래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 되어지는 전쟁이에요. 

 

또 하나, 이 시기에 대한 정보 대부분은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그리스인 헤로도토스의 저서에서 나왔는데, 이러한 점 때문에 그리스 편에서 본 역사, 즉 그리스에 우호적인 내용으로 편파적이죠. 

아쉽게도 페르시아 쪽에서 이 전쟁에 대한 기록이 없거든요. 이거 유념해주세요 :)

 

그럼 1차부터 차근차근 살펴볼까요?

1. 제 1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기원전 492년-기원전 490년)

앞선 편에서 말씀 드렸다시피 기원전 499년 일어난 아이오니아 반란 때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반란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화가 나있던 페르시아 제국의 왕은 반란을 진압한 다음해인 기원전 492년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 원정에 나섭니다. 

이 492년의 원정은 2개의 도시국가들을 합병했고, 잦은 태풍과 지휘관의 부상으로 이른 퇴각을 했죠. 

 

이후 페르시아의 왕이었던 다리우스1세는 나머지 그리스 도시국가들에게 외교관을 불러 잘못을 시인하게 했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만은 이를 거절, 외교관을 사형시켰어요. 

 

기원전 500년부터 479년까지 그리스, 페르시아 세력도 (출처: 위키피디아)

 

이에 또 화가 난 다리우스 1세는 기원전 490년 600척의 배와 3만명의 보병부대를 이끌고, 그리스 정복전쟁을 시작해요.

그들의 첫 목표는 아테네 정복이었어요. 

따라서 이를 위해 군대 베이스캠프가 된 곳이 바로 마라톤(Maraton)이라는 지역이었어요. 

여기서 1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가장 중요한 "마라톤 전투"가 일어나게 된답니다. 

 

페르시아의 침략을 눈치챈 아테나 사람들은 스파르타 사람들에게 참전을 권유했는데, 종교적인 이유로 오지 않았고, 아테네 사람들은 직접 대항해야 했어요. 

당시 페르시아 군대는 25,000명, 아테네인들은 10,000명 정도로 수적으로 페르시아가 우세했지만 결과는 아테네인들의 승리였어요. 양쪽으로 매복해 페르시아 군대를 애워싸 겨우 그리스인 192명 전사자를 남기며 6,200명의 페르시아 군대를 죽였죠. (출처: Ancient history 백과사전) 해전 또한 아테네인들의 전선이 월등한 우세로 승리했어요. 그러면서 거의 빈털털이로 페르시아 땅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답니다. 

 

이러한 승리는 페르시아인들에게는 치욕이 되었고 그리스 도시국가들에게는 어쩌면 힘을 합치면, 페르시아를 무너트릴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심어줘요. 

 

마라톤 전투를 나타내는 로마의 조각 (출처: 브리타니카 백과사전)

또 하나, 이 마라톤 전투 끝날 때 승리 소식을 아테네에게 달려와 갖다주는 행위는 지금 현재 마라톤이라는 스포츠의 기원이 되었답니다. 

2. 10년 간의 종전 시기 (기원전 490년 - 기원전 480년)

철저하게 최초의 전쟁 패배를 맛본 페르시아 제국은 자기나라로 돌아간 후 1차 때 보다 더 큰 규모의 전쟁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기원전 486년 페르시아 제국의 이집트령 국가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페르시아 제국 왕인 다리우스 1세가 죽으면서 그리스 정복 또한 미뤄졌죠. 

다리우스 사후 왕위에 오른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이집트 반란을 진압하고 나서야 다시 그리스 정복을 개시할 수 있었어요. 

이때 페르시아 군의 규모는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약 100,000명 정도 였다고 추정된답니다. (출처: 브리타니카)

 

이러한 시간적 여유는 그리스 폴리스들에게 대항을 준비할 충분한 시기를 주었죠. 

이들은 동맹을 맺어 육군의 통치권은 스파르타가 해군의 통치권은 아테네에게 일임했죠. 

또한 350여 척의 배를 준비했는데 이는 페르시아군의 3분의 1 수준이었어요. 

 

3. 제 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제국은 육군과 해군을 이끌고 2차 그리스 원정에 나섭니다.

육군은 마케도니아를 넘어 밑으로, 해군은 유보이에를 따라 밑으로 진격했죠. 

 

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이동 (출처: 위키피디아)

이 들의 남하를 알아낸 그리스 폴리스 연합군들은 그들의 길목을 막고 전투를 준비합니다. 

그러한 전투가 육전은 테르모필레 전투, 해전은 아르테미시온 해전이죠. 

 

<테르모필레 전투>

 

저 위 지도의 원으로 표시된 곳, 테르모필레는 구불구불 산길로,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하나의 전차가 지나갈 수 있는 비좁은 길로 이루어진 그리스반도로 들어오는 문과 같은 역활을 담당했다고 해요.

 

그리스 인들은 이 곳에서 페르시아 제국을 애워쌓을 예정이었죠. 

대격돌의 첫 2일은 그리스군대( 주로 스파르타인들) 가 적은 수로도 승리를 하는 듯 보였지만 3일째 그리스인들 중 하나가 배신을 하며 페르시아 군대에게 다른 길을 알려주면서 전세는 바뀌게 되요. 페르시아 군대 일부가 다른 길로 가서 오히려 그리스 군대 뒤로 나오면서 그리스 군대가 오히려 애워쌓아진 것이죠. 

 

그리스군(파란색)과 페르시아군(빨간색)의 이동 경로( 출처: 위키피디아)

이에 결국 그리스 군대 대부분이 후퇴하고, 스파르타 왕 중 하나를 포함 몇 남아 있던 사람들은 전사하고 말았죠. 

 

그런데 이 그리스 인들이 실패를 할 수 밖에 없던 이유가 또 하나 있었어요. 

바로 이러한 산악지형은 페르시아군대가 그리스 군대보다 더 익숙했다는 거에요. 

그리스군대가 페르시아 군대에 대한 정보를 덜 안 거죠. 

 

그렇다면 이 전투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바로 전투력 고조이죠. 

이 전투는 비록 졌기는 하지만, 모두 후퇴할 때 스파르타 왕을 포함 몇명이 끝까지 페르시아 군의 남하를 막기위해 싸웠다는 점에서 이후 일어날 모든 전투에서 그들을 위해 싸운다는 사기를 증진시켰죠. 

이 때문에 나중에 그리스가 결국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승리하고 나서, 이 전투에서 죽은 스파르타왕의 시신을 수습해 스파르타에 매장했고, 매년 그 기일에 성대한 축제가 일어난 것을 볼 수 있어요. 

 

<아르테미시온 해전>

 

육로를 막으려는 게 테르모필레라면 해로를 막으려고 노력했던 게 아르테미시온.

 

엄청난 수적 열세에도 페르시아 군대의 배가 폭풍에 많이 약화되었을 때 시작했기 때문에 초반 2일은 우세했어요. 하지만 3일째 되던 날 테르모필레 전투의 패배 소식을 듣자, 그리스 군대는 철수를 하기 시작했어요. 

아마 어짜피 육로가 뚫렸기 때문에 더 이상 막는 것이 도움이 안된다고 판단했겠죠?

따라서 이 해전은 끝이 나게 됩니다. 

 

< 계속된 남하 그리고 아테네 정복>

 

이 두개를 모두 승리한 페르시아제국 군대는 최종목표인 아테네 정복을 위해 계속 남하합니다. 그러면서 많은 폴리스 국가들이 페르시아에게 패배하죠. 

 

이처럼 페르시아 군대가 자신들을 굴복시키려고 온다는 것을 안 아테네 사람들은 도시를 비우고 그 옆에 있는 섬살라미스에 이주를 합니다. 그래서 결국 아테네에 도착한 페르시아군대에게 비워진 도시만 정복하게 되죠. 사람들은 다 살라미스 섬에 살고 있으니까요.  이에 또 화가 난 페르시아 왕은 해군과 육군을 모두 모아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섬을 침략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그의 해군은 살라미스 섬 인근에서 큰 폭풍우를 만나 거의 없어져, 그리스군과의 해전에서 힘도 못 쓰고 괴멸하고, 때마침 일어난 페르시아 제국 내 반란으로 그리스에 고립될까 두려웠던 페르시아 왕 포함 대다수는 아테네 정복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기원전 479년)

 

살라미스 해전 (파란색: 그리스군 빨간색: 페르시아군)(출처: 위키피디아)

 

그러면 이게 끝인가?아니죠. 페르시아 왕은 돌아가기 전 자신의 부하 중 하나를 그리스 사령관으로 칭해, 그리스 땅에 페르시아제국령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따라서 이후의 모든 그리스-페르시아 간 싸움은 장기전으로, 이 페르시아제국령을 탈취하는 그리스인들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죠. 

4. 전쟁 이후 바뀌게 된 관계

페르시아라는 공동의 적이 있던 전쟁기에는 나름 협력하고 평화로웠지만, 이 전쟁이 끝나자 폴리스들간의 관계는 매우 달라졌어요. 

특히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관계가 많이 악화되었는데요. 

그 이유는 바로 이득에 있었습니다. 

앞선 편에 말씀 드렸듯이 스파르타는 농경과 전쟁이 주인 국가로, 이 전쟁을 통해 핵심세력인 군인들이 많이 죽어나갔다는 점을 제외하면 이득은 별로 보지 못했죠. 

그에 비해 아테네의 경우 전쟁 이후 교역이 활발해지자, 엄청난 이득을 챙기게 되죠. 

바로 고전기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는 거죠. 

이러한 불평등함은 스파르타인들에게 불만을 야기 했고, 자신들과 적대적인 폴리스들과 아테네의 친함도 이러한 불만을 강화시키게 되죠. 이러한 적대관계는 아테네를 싫어하는 다른 폴리스들과 마음이 맞으면서 결국 그리스 폴리스들은 두개의 파로 나뉘게 됩니다. 이것은 나중에 펠로폰네소스라는 그리스 내전으로 진행되게 됩니다. 이 편은 다음에 설명드리는 걸로 할께요 :)

 


 

이번 편 재밌으셨나요?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의 전쟁, 이 전쟁은 그 기간은 길지 않지만, 서양사의 중요한 획 중에 하나에요 :)

최대한 재밌게 쓰려고 노력했는데 읽기 긴게 아닌가 걱정이 되네요.

다음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대해 얘기 해 볼 까해요. 

그럼 다음 포스트에서 만나요 :)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