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

중국사 1탄: 주나라( 서주시대, 동주시대, 춘추시대, 그리고 전국시대)

민훈트 2020. 9. 15. 20:46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중국사를 들고 돌아왔어요. 

이 전 편은 4대 문명 황하문명 편이니, 보고 오시면 더 이해가 쉬워요 :)

그럼 가볼까요?

<주나라>

본격적으로 중국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나라죠. 

기원전 1046년부터 기원전 256년까지 약 790년이라는 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크게 그 역사를 낙양으로 수도를 천도한 기원전 771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을 '서주시대', 그 이후를 '동주시대'라고 나눠 설명하죠. 또한 동주시대는 춘추전국시대라고도 불리며, 허울뿐이지만 주나라 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춘추시대'와 아예 모두가 독립국 상황으로 인정되는 '전국시대'로 나뉜 답니다. 

 

시대 구분 (직접 그림)

<서주시대(기원전 1046년 - 기원전 771년)>

그 시초인 무왕은 그 이전의 나라인 상나라(=은나라)의 관리였어요. 

하지만 상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이 미녀 달기에게 빠져 사치와 폭정을 일삼자 전쟁을 일으켜 왕이 되었죠.

주왕과 달기에 대한 내용은 황하문명 편에서 읽어주세요 :)

 

주나라를 연 무왕은 봉건제도를 본격적으로 도입해요. 

그는 자신의 친척들과 개국공신들에게 영토를 나눠 다스리게 하였어요.

특히 개국공신들과는 모두 혼인을 통한 혈연관계를 맺었죠. 

봉건제도라는 것은 최고 통치자인 왕의 밑에 이처럼 토지를 받은 세력들을 두고 그들의 중요도를 고려 직접 직급, 관직을 내리는 시스템을 말해요. 이러한 계급들이 나중에 제후(諸侯)라는 말로 통용되게 돼요. 그리고 더 나아가면 국(國)으로 변모되는 거죠. 이러한 봉건제도의 시초가 된 게 주나라의 무왕이 되는 거죠. 

이 봉건제도는 나중까지도 중요하니 잘 기억해두세요.:) 

 

12세기 그려진 주나라 무왕( 출처: 태국 왕립 박물관: 위키피디아)

하지만 그는 아쉽게도 오래 살지 못해요. 

개국 3년만에 사망을 하죠.

그리고 그 다음 왕에 오른 사람은 무왕의 아들 성왕이죠.

이때 성왕의 정치 보좌역을 하던 사람이 무왕의 오른팔 개국공신이자 동생인 주공 단이라는 사람이었어요. 

이 시기는 성왕이 어리기도 했고, 아직은 나라 정책이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초기 7년은 주공 단이 왕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죠. 안정화되지 않았기에 이 시기 수많은 내분이 일어났는데 대표적으로 상나라 왕자와 그의 추종자들이 일으킨 삼감의 난이 있어요. 

 

성왕과 그의 아들 강왕의 시기까지는 안정기를 확정하는 시기라고 이해하시면 되고요.

그 이후 주나라의 4대 왕 소왕과 5대 목왕시기나라의 팽창에 힘썼죠.

이때 무렵의 지도를 보면 이제 주나라가 점차 중원의 지배자 면모를 뽐냈음을 알 수 있어요. 

 

기원전 1000년 주나라 영토 (출처: 위키피디아)

이처럼 나름의 안정기를 갖던 주나라가 약화되기 시작한 것은 국가 설립 150년 후인 9대와 10대 왕부터였죠. 

특히 10대왕 여왕의 제위시절은 그의 포악하고 잔인한 행적에 앞서 살펴본 봉건제도의 핵심관계인 왕-제후의 관계가 최악으로 돌아서게 되요. 

 

여왕의 행적을 몇개만 읊어보자면, 사치가 심해 돈을 벌기 위해 제후들의 토지를 중간에서 가로채서 이득 취하기, 신하들이 말을 하면 죽이기, 바른 말하는 신하 죽이기 등이 있죠. (출처: 사마천 사기)

 

이러한 제후들의 불만은 결국 기원전 841년 대규모 반란으로 폭발되게 돼요. 

여왕은 반란을 피해 도망을 갔고, 중국 역사의 새로운 장 "공화"가 시작되요. 

공화가 뭐냐하면세습 왕이 끊긴 시기, 그리고 2명의 관리가 공동의로 통치하는 시기를 말하죠. 

한마디로 왕이 없는 시기를 말해요. 

이 공화는 왕이 도망을 간 기원전 841년부터 여왕이 도망지에서 죽고 그의 아들인 선왕이 왕에 오르는 기원전 827년까지 14년의 기간을 계속돼요. 

이 기간은 중국 역사에서 최초로 문헌을 통해 역사 확인이 된 시기이기도 하다. 

 

왕에 오른 선왕은 다시금 주나라 왕권을 강화하고 제후들과의 관계 개선에 노력했지만 그의 아들 유왕으로 인해 주나라 역사의 1탄, 서주시대가 끝나게 됩니다. 

 

아마도 중국사를 아시는 분들은 유왕이라는 이름은 몰라도 포사는 알 거예요. 중국의 4대 악녀 중 하나로 앞서 상나라(=은나라)를 멸망하게 만든 장본인 달기와 함께 들어가 있죠. 

 

18세기 그려진 포사 (출처: 위키피디아)

포사에 대해 잠깐만 예기하고 들어가면, 포사는 아름다운 외모의 유왕의 후궁이었지만 잘 웃지 않았어요. 

일하게 그녀를 웃기는 것은 사치품(비단) 찢기, 신하들 골탕 먹이기, 그리고 나중에는 잔인한 고문하기 등이 있었데요. 그래서 그녀에게 미친 왕이 그녀를 웃기기 위해 국고를 탕진했고, 신하들을 고문, 죽였죠. 

또한 그녀를 왕후에 올리기 위해 조강지처와 장성한 아들도 유배 보내요.

결국 이를 견디다 못한 제후들이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죠. 

유왕은 이렇듯 포사에게 빠져 결국 참형을 당하였죠.

 

<동주시대/ 춘추전국시대 (기원전 771년 - 기원전 206년)>

반란을 일으키고 성공한 제후들은 유왕의 아들이자 정실 왕후의 아들을 왕(평왕)으로 세웠어요. 

평왕은 기존의 수도가 반란으로 난리가 났기 때문에 그 동쪽인 낙읍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죠. 

그래서 학자들은 그 이전 시기와 구분하기 위해 이 시기부터를 "동주시대"라고 부르죠. 

 

그런데 문제는 유왕의 사건으로, 그리고 평왕을 새운 사람들이 제후들이었기 때문에 왕권은 굉장히 적어지고 대신 힘센 제후들이 많이 생겼다는 데 있어요. 

그 이전의 시기는 그래도 왕이 중앙집권 형식의 힘을 가졌다면 이제는 아닌 거죠.

<춘추시대(기원전 771년 - 기원전 403년)>

주나라의 근간이던 봉건제도가 본격적으로 무너지는 시기로 제후들 간 병합 싸움으로 살아남은 강자들이 점차 영토 국가화되는 시기예요. 

 

다시 말해 서주시대 말 1800여 개에 달했던 제후들이 춘추시대 중반에는 몇십 국으로 줄어들었죠.

하지만 아직까지는 주나라의 권리를 인정해 왕이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않았고, 주나라에 침입하는 이민족들을 막는데 군사를 보냈으며, 주나라 왕실을 지키는 데 돕는 본연의 봉건제도의 덕목을 시행했죠. 명목상이지만 주나라의 권위를 인정했던 시절이라는 것이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구분 짓는 가장 큰 핵심이에요!!

 

그렇다면 명목상이 아닌 실질적 우두머리는 누구였을까요? 

춘추시대에는 패자국이라는 우두머리 직책이 있었어요. 

패자국은 다른 제후들이 모여 맹주가 된 나라로, 매년 주나라 왕실에게 조회를 하고 조공을 바치고, 천자를 대신해 제후들을 감독,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죠. 또, 다른 제후국들은 패자국의 노고에 매년 공물을 바쳐야 했어요. 따라서 이 시기의 패자국은 사실상 왕과 같은 권위를 가졌죠. 따라서 이 자리를 놓고 수많은 제후국들이 싸움을 버렸죠. 이때문에 패자국들은 자주 바뀌었는데, 이 때 오른 모든 패자국들이 "존왕양이", 즉 왕을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한다라는 표어를 내걸어 자신들의 정당성을 널리 알렸어요.

 

춘추시대 제후국들 (출처: 위키피디아)

마지막으로 춘추시대에는 수많은 제후국들이 있었지만 가장 힘이 강성했던 5개 국의 왕을 통틀어 춘추 5패라고 부른답니다. 이 5 국은 위의 사진의 빨간색으로 표현된 진(Qin), 제(Qi), 송(Song), 초(Chu) 그리고 진(Jin)이랍니다. 이들의 수장은 기원전 665년부터 기원전 590년까지 앞서 열거한 힘의 중심 패자국을 지냈어요. 

 

춘추5패의 패자국 지위 역임한 연대표(출처: 영문 위키피디아)

<전국시대(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1년 )>

이처럼 혼동의 춘추시대에서 언제 전국시대로 넘어갔는지는 학자들마다 다르다.

고대 중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책인 사기를 쓴 사마천이라는 사람은 후에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통일 왕국을 세우는 진나라의 군주가 즉위한 시점인 기원전 476년을 그 시작으로 하고, 사마광이라는 사람은 춘추 5패의 일원인 진나라의 내전이 끝나고, 이 틈을 타 그 땅을 3명의 사람들이 스스로 제후라고 칭하여 나눠 다스렸는데, 주나라 왕실이 이를 인정해주는 시기인 기원전 403년을 그 시작으로 보았다. 

 

이번 편에서는 후자인 기원전 403년을 전국시대의 시작으로 사용했다. 

그 이유는 이 인정이 단순한 인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앞서 설명했듯이 춘추시대는 명목상이지만 제후들이 아무리 강성해도 주나라 왕실을 인정하고 그 밑에 제후의 위치가 있음을 인지하는 시기였다. 따라서 제후국들이 서로를 통합하기는 했어도 타인이 제후를 몰아내는 상황은 없었죠. 

하지만 진나라에서 일어난 3인의 제후화와 그것에 대한 인정은 이제 주나라의 왕권이 무쓸모라는 걸 나타내는 거였어요. 이제 왕이 내리지 않은 제후들이 생기는 거죠. 

 

전국시대의 제후 양상은 점차 달라져요. 

가장 먼저 힘센 제후들이 자신을 으로 부르기 시작해요. 

그들은 기존의 제후들의 의무인 공물도 보내지 않았고 이제는 주나라 밑이 아닌 독립적인 국가로 작용하죠. 

따라서 이 시기의 주나라는 통치권도 자신의 수도가 있는 지방만 있으며, 매우 궁핍한 삶을 살게 돼요.

주나라를 제외한 강성한 7개의 나라(연, 조, 제, 위, 한, 초, 진)를 일컬어 전국7옹이라고 한답니다.  

 

전국시대 7옹 위치 (출처: ancient.eu)

이 7 나라들은 서로를 향해 엄청나게 잦은 싸움을 했고, 한 나라가 커지면 동맹을 맺어 그 나라를 대항하는 등, 절대 강자가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었죠.

이러한 판도에서 두각을 나타낸 존재가 바로 진나라였습니다. 

 

진나라는 마지막까지 주나라를 인정하는 나라였어요. 

이러한 이유로 주나라의 마지막 왕이 후사가 없이 기원전 256년에 죽자, 주나라의 땅을 쉽게 흡수할 수 있었죠. 

 

또한 진나라는 법가를 따르는 국가였는데 법가란 군주가 정한 엄격한 법을 따르고 이를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하는 전제군주제의 확립에 도움이 되는 당시 주요 학파의 하나였어요.

이러한 법가는 경제적으로 살펴보면 중농주의와 토지 국유제, 공업화를 중시했고, 전체 사회적으로 보면 개인의 이득보다 공공의 이득을 중시했기 때문에 당시 상황에서 봉건제를 약화하고, 관료제 성격을 강화하고, 결과론적으로 국가의 중앙집권화를 크게 앞당길 수 있는 매개체로 작용했죠. 

또한 당시 많은 국가가 다른 학파이자 공자의 유가를 선택했는데 유가가 인, 도덕, 자애 등을 중시하는 수지치인(자신을 수행하고 천하를 이상적으로 다스린다)이라는 상대적으로 이상적인 부분을 중시했죠. 따라서 법가를 따르는 진나라 상대적으로 강점이 있었죠. 

 

이 때문에 진나라는 빠르게 발전을 했고, 그 결과 기원전 236년에 조나라를 침공하는 것을 시작으로 전국 7옹을 하나하나 멸망시켰고, 기원전 221년 마지막 제나라가 멸망하면서 전국시대를 통일, 진나라라는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이자 황제국을 성립하게 됩니다. 

 

진나라 통일을 이룩한 진시황제 (출처: 위키피디아)

 


상나라를 몰아내고 세워진 주나라. 

봉건제도를 시작해 왕과 제후라는 밀접한 관계를 이룩했지만, 결국 강성한 제후들에게 밀려 명목상 왕의 권리로 밀려났고, 나중에는 아예 하나의 제후급으로 밀려났죠. 

이 혼란을 틈타 장성하여 통일왕국을 이룩한 진나라까지 알아봤어요. 

재밌으셨기를 빌며, 다음에는 통일을 이룩한 진나라에 대해 알아볼 거예요 :)

그럼 안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