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한국사 제 3탄: 고대 연맹왕국/군장국가 (부여, 고구려, 동예, 옥저, 마한, 변한, 진한)

민훈트 2022. 10. 14. 23:18

저번 한사군 편에 이어, 오늘은 한국사의 큰 획, 초기 연맹 왕국/ 군장국가들에 대해 들고 왔어요. 

원래 이 시기에 우리나라에는 크게 2개의 연맹 왕국과 3개의 군장국가들이 존재하는데, 이 중 고구려, 삼한의 일부에서 발전된 백제, 신라는 나중에 삼국시대의 주역으로 발전하여 그 역사가 길기 때문에 따로 서술을 하려고 해요. 따라서 이번 편에서는 이 5개의 초기 국가들 중 고구려를 제외한 4개에 대해 살펴볼까 해요. 

고구려, 백제, 신라는 다음편들을 기대 해주세요. 

 

1. 용어정리: 연맹 왕국과 군장국가

 

일단 본격적인 역사에 들어가기 앞서 용어부터 알고 갈까요?

역사공부에 있어서는 용어를 알면 반은 이해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일단 연맹 왕국이 뭘까요? 군장국가와 차이점은 뭘까요?

연맹 왕국이라는 것은 이 국가가 표면적으로 왕이 있고 그가 다스리는 왕국 형태이지만, 아직은 우리가 늘 아는 왕국 형태에 비해 왕의 집권력이 약하고, 왕국 내 함께 힘센 여러 부족들이 연맹을 이뤄 통치되는 국가 형태를 말하죠. 

그래서 왕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해요

군장국가는 연맹 왕국의 아랫 단계로 인식할 수 있죠. 

따라서 왕이 없고, 군장이 다스리는 국가니까요.

 

왕이 있고, 없고, 쉽죠?

 

자 그럼 본격적으로 들어가 볼까요?

 

고대국가들
고조선 이후 생성된 여러 고대국가들 (출처: Zum)

2. 부여 (기원전 3세기경 - 기원후 494년)

1) 부여의 특징

연맹 왕국들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건설된 나라인 부여.

위만조선과 동시대인 기원전 3세기경 설립되었다고 알려져 있죠. 

부여는 후에 나올 고구려, 백제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나라인데, 바로 주몽이 이 부여의 왕자였기 때문이죠. 

주몽은 후에 백제를 세운 온조의 아버지이기도 하죠. 그러니까 부여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파생되었다고 할 수도 있죠. 

 

고구려 주몽
주몽(고구려의 동명성왕)의 능 (출처: 위키피디아)

아무튼 부여는 지역적으로는 고조선의 영토 북쪽인 만주 평야에 자리를 잡았었고, 지형 특성상 아주 이른 시기부터 농경을 시작할 수 있었죠. 

 

사실 이 시기의 대다수의 나라에서 핵심 산업은  바로 이 농경이었어요. 

국가가 성장하려면 인구가 있어야 하는데, 자국민을 먹여 살리는 방법으로 농업이 최고니까요. 

 

그런데 이 농경을 하는 나라들에게 최고로 중요한 국가행사 현대의 추수감사절에 해당하는 제천행사예요. 

제천행사가, 즉 하늘에 지내는 제사가 그 해의 기후를 좌지우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앞으로 나오는 모든 연맹 왕국들에는 자신들만의 제천행사가 있어요. 

이게 또 중요한 포인트죠. 고로, 이름이 다르니 기억은 필수!!~

 

아무튼 부여의 경우 매년 12월 영고라고 불리는 제천행사를 열었고, 이때 제사는 물론 소의 발굽으로 내년도 점을 치는 우제점법을 시행하기도 했답니다. 

 

사회적으로 가장 특이점 중 하나는 연맹 왕국 체제였다는 것이에요.

따라서 왕 밑에 짐승의 이름을 본떠 명명된 4개의 부족 "가"가 있었죠; 마가, 우가, 저가, 구가.

이들의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부여는 표면적으로는 왕이 모든 것을 다스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이 4가들이 전국을 4 등분하여 각자 다스리는 사출도(四出道)가 있었고, 왕은 국도(國都)라는 지역만을 직접 지배했죠.  

부여의 5부체제
부여의 5부체제

하지만 만약 가뭄이나 수해가 나면, 왕이 모든 책임을 지어야 했답니다. 

해택보다는 책임감이 막중한 자리가 부여의 왕이었죠.  

그 밖에도, 이러한 5부 밑에는 지배층 계급인 대사(大使), 사자(使者)가 있고 그 밑에는 하호(下戶)라고 불리던 농노, 마지막으로 노예로 구성되었죠.  

 

부여 특징
부여의 특징

2) 부여의 흥망성쇠

부여는 사실 그 설립 초기부터 기원후 1세기가 될 때까지, 약 400년 간 저 위의 5개국 중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국가였습니다. 

중국에서 쓰인 역사서인 [진서]에 따르면 기원후 1세기경, 사람 수가 국력이던 그 시절, 나머지 국가들이 3만 명의 인구를 넘기기 힘들었을 때, 부여는 8만 명이 넘을 정도의 대국이었다고 하죠. [출처: 위키피디아]

 

하지만 부여에게는 큰 지리적 약점이 있었어요.

바로, 평야에 세워졌다는 점이죠. 

이는 초기 이른 시기에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한 국가적 강점이기도 했지만, 나라 자체가 외세의 침입에 약할 수밖에 없다는 단점이기도 했죠.

이러한 약점은 기원후 2세기경 혼잡해진 국제질서 속에 혼돈을 야기하게 되죠. 

이 당시가 바로 중국의 주나라의 멸망으로 통일 중국이 분해되어 수많은 국가들이 패권을 위해 싸울 시기였고, 더 나아가 한반도에서의 패권을 강성한 고구려가 크게 노리는 시기였기 때문에, 수많은 외세의 침략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죠.

그 결과 기원후 285년 중국의 선비족에 침략에 부여의 왕이 사망하게 되어 국력이 크게 손실되었고, 그러한 상황 속 겨우 연명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기원후 346년에는 연나라 왕의 공격을 받아 고구려의 보호를 받게 되었으며, 결국 기원후 494년 부여의 마지막 잔재국인 북부여가 고구려에 의해 흡수 합병당하면서 결국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죠. 

 

부여
부여의 유물이 발견되는 지역 (출처: 위키피디아)

3. 옥저 (기원전 3세기경 - 기원후 285년)

1) 옥저의 특징

옥저는 현재 함경남도 이북에서 두만강 유역까지 지역에 생성되었으며, 당시 지리적으로 북으로는 부여와 고구려가 있었고, 남으로는 동예가 있는 샌드위치 형태의 국가였어요. 

또한 동해안에 밀접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외부의 문물을 받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죠. 

대신 큰 바다 덕분에 토지가 비옥했고, 해산물들이 많아 경제적으로는 윤택했다고 해요.

 

옥저는 부여나 고구려와는 다르게 연맹 왕국으로는 발전하지 못했고, 군장국가 단계에서 멸망했는데, 그 이유로는 나날이 강성해진 고구려가 있었죠. 고구려에 가까웠던 지리적 탓에 옥저는 굉장히 이른 시기부터 고구려의 압박을 받았고, 긴 세월 그들의 밑에서 공물로 소금이나 어물을 보내는 실정이었어요.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같은 부여계인 고구려와 다르게 옥저만의 특이한 풍습이 있었는데, 이가 어린 시기부터 여성이 결혼할 남성 집에 살며 성장 후 실질적 결혼을 하는 민며느리제, 누군가 죽으며 일단 매장한 다음 나중에 하나의 가족 공동 묘역에 묻는 가족 공동묘 제도가 있었죠. 

 

옥저 특징
옥저의 특징

 

2) 옥저의 흥망성쇠

옥저는 대다수의 역사 시기를 그 당시의 강국에 복속되어 지속되었어요. 

예를 들어 기원전 3세기 후반경 설립이래, 약 100년 후인 기원전 2세기경에는 위만조선에, 이후 기원전 108년에는 한의 사군현인 임둔군에, 기원전 82년에는 현도군에, 기원전 75년에는 낙랑군에 복속되어 명맥을 유지했죠. 그러다 기원후 56년에는 고구려에 의해 한사군에서 벗어나 고구려의 간접적 통치를 받게 돼요.

 

이러한 간접적 통치에서 군장국가로 발전한 옥저는 기원후 244년에는 위나라와의 싸움에서 크게 이겨 그 위상을 떨치는 가 하였지만, 결국 기원후 285년 고구려에 의해 정벌되면서 완전히 고구려로 편입되면서 옥저는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죠. 

 

결국 어찌 보면, 이미 강성한 나라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며, 왕국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소멸된 비운의 국가라고 할 수 있어요. 

 

4. 동예 (기원전 82년 - 기원후 6세기?)

1) 동예의 특징

원래 국가의 정식 명칭은 '예'이지만 중국의 예족, 예 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동예라고 불러요. 

현재 북한의 원산에서부터 남한의 강릉지역까지 동해안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고, 위의 옥저와 마찬가지로 한사군 휘하에 있던 나라로, 군장국가였죠. 동예 또한 옥저와 고구려와 함께 부여계로 알려져 있으며, 고구려의 압박으로 인해 동에 또한 크게 성장하지 못한 케이스이죠. 

 

동예는 지리적으로 동해안가에 있어, 비옥한 땅과 해산물들이 있어 경제적으로는 부유했고, 말이 많아, 작은 조랑말의 일종인 과하마가 이 동예의 특산품이기도 했죠. 또 다른 특산물로는 동예의 뛰어난방직 기술 덕에 명주(=비단)이나 삼배가 있어요.

 

사회적으로는부족 제도가 중시되었는데, 이 때문에 부족 간 결혼을 금하는 족외혼 풍습, 다른 부족의 생활권을 침범하면 노비, 소, 말 등의 재산으로 변상하게 하는 책화 풍습이 매우 엄하게 지켜졌죠. 또한 

 

동예 또한 농경중심이기에, 제천행사가 있었는데, 바로 무천이라는 행사로 매년 10월에 행해졌다고 하네요. 

 

동예 특징
동예의 특징

 

2) 동예의 흥망성쇠

동예의 경우 그 흥망성쇠가 잘 알려지지 않았어요.

특히 동예의 멸망의 경우, 그 주체가 확실치 않아 여러 가설들이 등장하는 중인데, 가장 대표적으로 3개의 가설이 있어요. 첫 번째로는 신라가 전성기에 동예를 정복해 복속했다는 신라 합병설, 두 번째로는 고구려가 동예를 기원후 4세기경 복속하여 속국 형태로 2세기를 보내다 합병되었다는 고구려 합병설, 동예가 군장국가 단계에서 중앙집권화를 달성하지 못했고, 내부 분열과 반란이 일어나 스스로 멸망했다는 자연적 멸망설이 있죠.

이 중 현재로서는 신라 합병설이 가장 유력한 가설로 인정받고 있는데, 이는 기원후 6세기 중반 신라의 진흥왕이 활발한 북진으로 다수의 영토를 흡수했던 점과, 북한 함경남도에 있는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와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가 발견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해요. 

 

뭐 아직은 확실한 사실 확인은 안 되지만요.

 

신라 진흥왕
신라의 진흥왕 (출처: 우리역사넷)

 

5. 삼한 (기원전 2세기 - 기원후 3세기)

1) 삼한의 특징

삼한은 당시 한반도에 자리 잡고 있던 마한, 변한, 진한을 일컬으며, 일반적으로 마한은 현재 경기/충청/전라도 지역에, 변한과 진한은 경상도 지역에 있었다고 추정되죠.

 

삼한의 성립 배경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기원전 2세기경부터 고조선 남부지역에 생성된 진(辰) 국에서부터 유래되었다고 생각하며, 진국의 잔재가 위만조선의 지배에 대항해 여러 개의 부족 연맹체를 이룩해 나가면서 진한으로 발전했고, 진한과는 언어/인종은 동일하나 지역적으로 구분된 변한, 거기에 중국에서 이주하면서 생성된 초기 마한이 있어 삼한으로 발전되었다고 추정되죠.

 

이 삼한(마한, 변한, 진한은)은 초기부터 지배층을 필두로 하나의 국가를 이룩한 다른 연맹국가와는 달리, 국가발전 정도가 낮아 초기 시기에는 여러 개의 부족 국가들이 각각 힘을 기르며 살고 있었죠. 마한은 54개의 소부족 국가들이, 변한과 진한은 각각 12개의 소부족국가들로 구성되었다고 알려져 있어요.  나중에 돼서 백제가 강성해져 마한 일대를 장악하고, 신라가 진한을, 가야연맹이 변한을 장악해 삼국시대의 기초를 다지기는 하지만, 이 초기 연맹 왕국/ 군장국가 시기에는 이 모든 국가들이 아직 그저 삼한의 하나의 부족 국가 정도로만 발전해있어요. 

 

삼한의 정치상황을 보면 제정분리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각 소부족국가병, 왕이나 족장이라는 정치적 우두머리와 지배층과는 별개로 제사를 담당하는 천군(天君)이 따로 있었죠. 이들은 소도(蘇導)라고 부르는 특별구역을 지배했고, 매년 정기적으로 하늘에 올리는 제사를 담당했다고 보여요.  또한, 이 소도는 신성시되는 구역이었기 때문에 여기로 도망 온 죄인을 지배층의 권력으로 함부로 잡거나 돌려보낼 수 없었죠. 이로 인해 삼한이 지배 권력과 종교적 권력이 분리돼있었음을 알 수 있죠. 

 

삼한 역시 부여, 고구려, 동예, 옥저처럼 농사가 중심이었고, 그 때문에 제천행사 또한 크게 일어났죠. 삼한의 경우, 매년 5월 씨앗을 뿌리는 파종을 축하하며 한번, 10월 수확을 하고 나서 감사를 드리며 한번, 총 2번의 제천행사를 진행했던 걸로 알려져 있어요. 

 

삼한의 특징
삼한의 특징

2) 삼한의 흥망성쇠

기원전 2세기경 설립된 이후 초기 삼한은 가장 그 덩치가 큰 마한의 맹주인 목지국/목지부족을 필두로 운영되었다가, 기원후 3세기 초 목지국이 멸망하자 부여계인 십제국(후에 백제로 변화)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후 마한은 부여 등 북방계 유이민을 중심으로 형성된 십제국/백제가 세력을 통합해 백제로 재편되게 된다. 

그 이외의 지역들의 경우, 진한의 12 부족은 그들 중 하나인 박혁거세를 위시한 사로국(후에 신라로 변화)과 그들의 금속 문화에 수용되어 세력화를 진행해 신라로 재편되었고, 변한의 경우는 구야국(후에 가야로 변화)을 위시하여 변한의 12개국이 수용되어 가야로 재편되었다. 

 

삼한 맹주국
기원후 3세기 삼한과 맹주국 (출처: 위키피디아)

6. 초기 연맹 왕국/군장국가 시대의 의의와 삼국시대로의 이동

고조선, 한사군의 시대를 지나며 한국사에는 수많은 초기 부족/연맹 왕국들이 등장하게 되죠.

그중 상당수는 고구려에 복속, 합병되어 고구려의 성장을 야기했고, 삼한은 각각 백제, 신라, 가야라는 국가들로 발전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삼국시대를 펼치게 되죠. 

비록 부여, 동예, 옥저 등이 역사 속에서 사라지기는 하지만, 부여의 왕자인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고, 고구려의 왕자였던 온조가 백제를 세우고, 부여의 이주민들이 신라, 백제, 가야에 펼쳐지며, 그들의 많은 문화 풍습이 삼국시대의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결국, 한마디로 이 초기의 연맹 왕국/ 군장국가 시대는 후에 나올 삼국시대의 배경으로 작용한 거죠. 

신기하죠?


자, 이번 편에서는 한사군 이후 한반도에서 펼쳐진 초기 연맹 왕국/ 군장국가 4개에 대해 살펴봤어요. 

어떻게 재밌으셨나요?

이번 편에서의 의의를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며, 다음 편에는 본격적인 격동의 시대, 삼국시대를 알아볼까 해요. 

내용이 점점 많아지고 복잡해지겠지만, 잘 풀어볼 테니 끝까지 함께해요. 

그럼 다음에 만날 때까지 안녕 ~~ :)